레지던트 evil

2012. 10. 21. 23:17 from yS 2010▷2013

5주간의 과 실습이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설문지 작성 미션이 떨어졌다.

설문지... 어차피 누가 쓴건지 다 아는 설문지따위 귀찮으니 대충하자 싶었는데

아.. 교수님께는 완전 익명이 될 것이며

질문 내용도 'worst 레지던트'라든가 '개선에 필요한 점' 처럼

속에 쌓인 말을 다 털어놓을 데가 있어서 그래서 신이 나서 작성하려고 하는데

 

카톡방에 'worst 레지던트는 당연히 B선생님이죠' 라는 글이 불쑥 뜨는 거다.

B선생님...

B선생님은 이 과에서 완전 문제전공의인데

어떤 점에서 문제냐면...

완전 무능하다..

 

레지던트가 하는 일은 주로 병동관리업무다

입원환자를 평가하고 치료 계획 세우는데

이게 처음 입원할 때만 하는게 아니라 SOAP라고 해서

매일매일 환자 상태를 재평가하고 치료계획을 세워가는 거다.

물론 전공의는 아직 수련단계이므로 방향이 안 잡히는 환자에 대해서는 담당 교수님이 조언을 해주면서

그런 과정이 환자를 보는 training 과정인건데

따라서 SOAP는 매일 잘 써야 된다.

기록 작성 자체가 로딩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작성을 함으로써 환자상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그걸로 자기 업무를 더 잘 정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무기록이니까 꼭 작성해야 하는 거기도 하고.

 

첨에 B선생님에 대해 PK들이 수근대기 시작한 건 이 SOAP기록을 일주일씩 계속 안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PK가 환자 의무기록에 관심을 가지는 건 배정받은 환자에 대한 케이스를 작성하려는 건데

환자를 맡는 기간은 일주일이 채 안되고 환자 입원 기간은 그보다 길거나 짧거나 해서

결국 PK가 직접 환자 문진을 하고 피지컬과 같은 신체검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다.

따라서 담당 전공의 선생님들의 의무기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는데

이 중요한 의무기록을 안해주는 선생님이었던 거다 , B선생님이..

대학병원 의무기록은 열심히 근무하는 전공의들 덕분에 굉장히 잘 채워져있기 마련인데

완전 텅빈 의무기록지만 주루룩 나오는 전자차트라니 보고 황당했을 거다.

 

그래서 우리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B선생님..

SOAP를 안 쓰는 건 환자 관리이 너무 과중해서 도저히 SOAP작성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환자 관리 기록을 하는게 오히려 현재 상태를 더 명료하게 정리해줘서 일이 더 원활해질텐데

뭔가 상당히 일에 치이고 버거워하나보다 싶었다.

아직 수련중이니깐 버거울 수도 있고

정말 적성이 안 맞아서 고생하고 있는 걸수도 있을 일이었다.

 

또다른 소문으로는 쿨하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중환자실 담당 교수님이 B선생님에게

다음부터는 니가 중환자실 안 돌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거다.

환자 관리 정말 못한다며, 중환자실 맡으면 안되겠다고...

 

그래서 그냥 '아,,, 저선생님은 일을 좀 못하나 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근데 학생들도 이 일 못하는 선생님이야말로 당연히 worst 레지던트라고 대놓고 말하다니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이렇게 이 과의 교수님이나 높은 연차 선생님들에게 한심한 사람 취급당하는 사람을

학생들마저 worst레지던트랍시고 이름을 잔뜩 적어올리는 거 정말 싫었다.

설문지는 결국 '학생 입장에서'의 worst인데

이 선생님의 무능에 대해 왜 학생들마저 worst라고 지적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B선생님이 제대로 기록안한 환자 경과때문에 학생 누군가들이 피해라도 봤나

그래서 B선생님을 worst라고 찎었나

이런저런 생각들..

 

첨엔 이 매정한 세계, 정말 별로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진정하고 다시 생각하기론...

 

일단 '당연히 B선생님이 worst죠'라는 녀석의 말에 대해 큰 호응은 없었다는 거다.

그래서 학생들 각자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평가할 때, 어떤 사안을 볼 때 사람마다 참 다른 기준이 있는 거라는 걸...

이럴테면 '각자의 입장차'라는 말은 굉장히 쉬운데 그런 쉬운 말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아예 기본적 세계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론들에 대한 증거같아서

그래서 좀 흥미로워졌다.

 

그러니깐 동의수세보원에 보면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은 각각  선악, 근타, 지우, 능부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B선생님의 SOAP기록 미비에 대해서 worst라고 평가하는 학생은

뭐랄까... 근타 즉, 게으름이라든가 혹은 능부 즉, 무능하고 싹수가 없어보이는 그런점이야말로

몹쓸사람이 가지는 최악의 속성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에비해 내 입장에선 적어도

뭔가를 성실하고 열심히 해왔다고 해서 그걸로 다른 면을 용납할 수 있거나 그렇진 않은편이니

B선생을 worst로 뽑은 녀석과는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입장이  많이 다른 거지.

 

아무튼...

이worst 레지던트...

난 써낼 사람이 딱 정해져있어서 첨엔 신났지만

막상 B선생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 거론되자

더불어 학생들에게 확인 싸인점수를 100% 0점줘서 PK괴롭힌다고 소문난 K선생님

그 선생님이 혹시 또 누군가들의 worst명단에 오를까 걱정이 돼서

막.. K선생님이 과일도 주셨고 콜라도 주셨고 참 좋은 분인거 같다 와 같은 말을 카톡에 떠들어댔다.

어떤 학생들은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R샘 이름을 차마 적을 수 없으므로

자기한테 아무것도 안해준 R샘 이름을 쓴다고 했으니깐

0점 싸인으로 피해를 준 K선생님도 worst명단에 오를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게 되는 거다.

K 선생님은 좀 뭐랄까, 세상에 좀 치인 느낌이 있고

B선생님만큼 일 못해서 SOAP제대로 안쓰고, 약간 사차원으로 의국에서 따돌림을 받는 거 같아서

그냥 좀 안쓰러웠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0점주면서도 자조적으로 '나는 나쁜 레지던트'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worst라고 몰아대면 그 선생님의 내면은 점점 더 삭막해질 거 같아서 싫음.. 

 

그리고 내가 뽑은 worst..

흥...

나도 레지던트에게 확인 싸인을 받았다

다들 쉽게 쉽게 받는 만점싸인을 나는 그 R때문에 계속 반토막만 받고 있었는데

그래 사실 점수 받는 거야 결국 여러 상황이 맞물리는 복불복이니깐 별 불만은 없다.

케이스라든가 다른 평가에서 점수 팍팍 깎인것도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고.

문제는 마지막 날 이 레지던트가 나에게

'내가 왠만하면 만점주는데 선생님은 도무지 안되겠네요'라고 환자 제대로 안본다며 빈정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쉽게 만점 받은 다른 친구들은 환자 아예 안보고 SOAP베껴 적어 냈지만

반토막 점수가 적힌 사인을 매일 매일 감사하게 받아온 나는 이 R때문에 환자를 매일 봤다는 거다.

점수 반토막은 상관없지만 도무지 안되고 어쩌고 비난은 정말 못 받아들이겠다

눈이 대체 어디 달려있길래 내가 '도무지 안될 사람'이 되는 거냐고.

이부분에서 기분이 팍 상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 레지던트를 레지던트evil 넘버원으로 신나게 적어낸 거다.

익명 설문지 만세..

사실 마지막날 사인받으러 가기 훨씬 전에 교수님과 이 R과 학생들이 함께 하는 회진 일정이 있었는데

그날 교수님이 이 레지던트의 이번차 마지막 일정이라며 오붓하게 돌테니 학생들은 오지 마세요 라 했었다.

말이 좋아 오붓하게지... 학생들 있는데서 전공의들 야단치기 힘드니깐 오지말라고 하는 거지

내 예상으로 이 레지던트는 분명 회진 때 교수님한테 된통 까였고

그 스트레스를 나한테 푼거겠지. '도무지 안될 사람'이라며.

다들 그냥 SOAP베껴 싸인 받는거 자기도 PK해봤으면 뻔히 알것이며 자기도 분명 그렇게 했을 거면서

 '도무지 안될 사람'이라니

 

그래도 이 정도로 구는건 귀여운 거다.

worst에 이름한번 적어내고 퉁치면 될 사안이다 ㅋㅋ

 

 

전에 여자의사 펠로우와 짝짜꿍이 맞은 그 과의 의국장 여자레지던트는

인신공격 받고 나가는 내앞에다 '조에서 제일 미움 받는 사람이 발표하나봐요 낄낄'이랬고

다음날에 조 일정 보고 하러 갔을 때도 '사과하러 왔냐'며

지난밤 여자의사 펠로우와의 뒷담화 짝짜꿍을 과시하길래

밤새 쌓아놓은 분노를

'지적하신 부분이 정말로 죄송해서 말인데, 교수님에게 직접 사과하겠어요'라고 본뜻은 

'니네가 핑계대고 있는 바로 그 교수님한테 나 괴롭힌다고 일러바치겠다'의 뜻으로 해석되는 말로써

 집어던졌다.

그랬더니 교수님 화를 돋굴 것이라며 날 뜯어말렸고

자기 눈에 보이지 말라고 했으며, 결국 조장 갈아치우라는 말까지 했는데

이걸 또 학생들이랑 친분이 있는 1년차를 통해 다시 전달하면서

조장은 확실히 바꿔야 되고 불만 있으면 찾아오라고 그랬다네.

날 무슨 조원들 고생시키는 고문관 같은 존재로 만든 셈인데

끝까지 가볼까 하다가 걍 관뒀다.

애들이 워낙 바보같이 레지던트들을 두려워하길래,

내가 결국 걔들에게 피해를 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사펠로우-여자레지던트 의국장 콤비의 만행이야말로

설문지 피드백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는데

분명 그 콤비의 선수로 내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그과의 다른 교수님이

구두로 과 실습 피드백 요청을 하셨다. 전혀 익명이 아닌상태로.

그때는 피드백이랍시고 좋게 좋게 돌려말하면서 속으론

'다음에 학기 말에 성적 나올 때 교수평가서에 악플을 달아야지' 라고 맘먹었는데

막상 학기말이 되면 귀찮기도 하고 까먹을 거 같다.

 

 

아..

그 여자의사펠로우가 교수님 복강경수술 어시스트 하는 걸 참관한 적이 있는데

복강경은 모니터가 시술자 시야쪽에 하나씩 있으므로 결국 한 필드당 최소 두개의 모니터가 있다.

교수님과 어시스트 펠로우가 각자 환자 반대편에 서서 수술이 진행됐고

난 교수님 쪽에 서 있었으므로 그 펠로우가 모니터를 보다보면 나와 시선이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복강경수술이고 근무연수1년도 안돼서 그런지 펠로우가 굉장히 못하는 거였다. 

앞으로 가라고 하면뒤로 가고 그런식의 초보적인 서툰 모습인거지.

서툴면 서툰대로 하면 되는데 이 사람이 우습게도 자기 앞의 모니터를 안보고

자기 뒤쪽의 모니터, 즉 교수님이 보셔야할 쪽의 모니터로 등을 돌려 힘들게 보면서 서툰 수술 어시를 했다

그래서 나랑은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난 '그간의 모든걸 이해한다'는 느낌의 굉장히 따뜻한 시선으로 펠로우의 몸짓을 주시했는데

왜 그렇게 편한 모니터를 안보고 힘들게 허리를 돌려 뒤를 보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귀여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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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vi. :

어린이들 이름

2012. 10. 7. 22:41 from yS 2010▷2013

2학년 소아정신과 수업때 조별로 프리제테이션을 한적이 있는데

그때 조원명단을 보며 발표자 선정을 하시던 교수님이 우리조명단을 보다가

이슬비(가명,,대략 이런 느낌으로 성과 함께 감성적 단어가 되는 이름이었음)는 너무 미성숙하니깐

더 머츄어한 주리(가명,,대략 이런 느낌으로 초성에 ㄹ이 있어서 서구쪽 이름을 흉내낸듯한 이름이었음)가 발표해볼까 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시대별로 유행하는 이름이 있고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는것이다

소아과를 돌면 내과의 모든분과 뿐아니라 신경과 유전대사질환 파트까지 다 보게되니깐

여기가 대체 무슨과인가 가끔씩 지남력에 장애가 올때도 있지만

그래도 회진때 받아드는 환자현황표를 보면 소아과라는걸 마음속 깊이 느끼게된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신식이름 리스트 소아과 말고 대체어디서 이런 환자명단을 보겠는가

여기는 틀림없는 소아과다

 

이슬비같은 성을 이용한 예쁜 명사화

주리같은 서구스타일 이름

다솜 소담같은 순 한글 분위기의 이름

기존에 잘 안쓰던 단어인 율 이나 흔 같은글자를 넣어 신선해서 세련된 느낌이 드는 이름

 

이런 요즘이름들 하나하나는 대개가 21세기 한국어 사용자에게 현대적이라는이미지를 주는데

근데 막상 이름 `리스트`를 받아든입장에서는 뭔가 유들유들 흘러가기만 하지

전혀 각이, (각이라고 하니 뜻이 잘 전달이 안되는데) `엣지`가 없는거다

멈춰서서 돌아보게 할만한 이름이 없달까

그냥 단어의 각이 빳빳하게 살아있고 한자를 듣기전까진 언뜻 무슨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릴수없는

고전적인 한국이름이 그립다

고전적이라곤 하지만 사실 한자가 사용되기전까지 한반도에서 사용되던 이름은

예를들면 해오녀나 아라처럼 각이서지 않은 이름이긴했다

한국인이 한자로 단단하게 조여진 이름을 통상적으로 쓴건 대략 고려시대부터가 아닐까

그 이전에는 한자명이 있어도 그걸 풀어읽기도 했을거 같다 그냥 내생각,,,

 

다시 소아과 환자명단으로 돌아와서...

2012년의 어린이 환자 이름을 보면서 보람어린이 리아어린이 라고 중얼거리다보니

한 60년전 소아과병동에 는 틀림없이 미자어린이 순자어린이가 있었겠구나 싶어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물론 그런 이름은 식민지시대의 시대상이 반영된 이름으로 단순히 옛날이름은 아니다

예를들어 그 이름들의 주인들보다 더 옛날사람인 명성황후의 이름은 자영이였다

보통의 한국인이 듣기에 예쁘다 생각하는 이름

요는 이름을 지을때 성의를 가졌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일것이다

 

그래서 성의를 가지고 이름을 지어본다면

난 요즘어린이들의 날개달린듯 하늘거리는 이름 말고

단단한 한자이름인데 좀 중성적인 느낌이 드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예를들어 은호

연애시대의 손예진과 황진이에서 장근석이름이 은호였는데

여자입장에서 은호는 남자이름 같으면서도 감성적이라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다

뭐 생각해보니 나도 예ㅅ날에 열살이전에 아빠에게 하늘거리는 이름,

정신과교수님이 이슬비보다는 머츄어하다고한 주리스타일의 이름으로 바꿔달라고 졸라댄적이 있다

 

그러게 아무리 성의를 가지고 작명을 해도 당사자에겐 시시때때로 부족한 부분이 생기는게 이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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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2012. 9. 29. 17:40 from yS 2010▷2013

평생 한 도시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과

평생 그 도시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의 선택은?

예전에 이 질문을 보곤 막연하게 다양한 것을 보고 놀러다니는 것이 더 좋은 것인 거 같아

깊이 생각안하고 후자쪽을 선택하리라 했다.

말이 주는 이미지때문에 보수보다 진보가 좋은거라고 여기며

그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그저 취향의 문제에 지나지 않게 만들어버리던 사람들처럼.

 

간단하게 사는 건 좋은 거다.

이사준비 때문에 짐을 정리하다보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도모르는새

이끼끼듯이 내 일상에 피어나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그제서야 그것들을 다 털어내고 짜낸후 다시 좀더 가벼워진 자신에게 안도하는데

그렇게 주변에 여유를 두는건 참 좋은 거다

스펀지에 물 배어들듯 스며들어서 날 꼼짝못하게 일상에 묶어두는 그 생활의 찌꺼기들은

매일매일 청소와 정리라는 걸 해도 부지불식간에 내 주변을 메꿔버려서

이사라든가 뭔가 그런 큰 변동으로 힘차게 털어내주지 않으면 도대체 없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집을 나와살면서 이렇게 이사를 다닐때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정리하고 버렸는지.

그래서 이삿짐을 싸는 동안은 매번 새삼스럽게

'언제죽어도 문제없을만큼 내 주변을 가볍게 단촐하게 하자..'고 다짐했던거 같은데.

 

 

올봄인지 초여름인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우리 동 쓰레기 분리수거하는곳, 그러니깐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는 곳에서 아기고양이를 발견했다.

희동이랑 비슷한 털무늬를 가진 노랑이코숏이고 정말 작았는데 아마 태어난지 한달 정도 됐으려나..

어미를 잃은건지 버림받은 건지

아무튼 벌써부터 사람을 무서워할 줄 알아서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울지 않고 조용해지면 또 울기시작하는데

우는 고양이 달래려면 먹을걸 주는 수 밖에 없는 거 같아서

그래서 우리 고양이들 사료를 물에 불려서 쓰레기통 주변 잎파리 위에 좀 얹어두고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든가, 아니면 누가 거둬가든가 하겠지,,

그러면서 크게 마음을 안 쓰려 했는데

 

한달 두달 만에 가끔씩 녀석이 눈에 띄었다.

조금씩 커가고는 있는데 영양이 결핍돼서 그런지 머리도 별로 크지 않고 몸은 말랐고

어떤 느낌이냐면 아기고양이가 몸만 길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사람도 잘 피하고 차도 잘 피하면서

아파트 건너편의 우체국과 상가건물 쪽까지도 먹이를 구하러 다니는 거 같았다.

먹으면 배탈날거 같은 더러워보이는 음식을 고양이들은 찾아먹는데

그래도 녀석들이 먹은 역시나 더러운 음식의 영양소에서 만들어진 여러 면역물질들이

또다른 더러운 음식에서 유발될 감염이나 위해를 막아줄것이다.

그렇게 거리에 흩어진 음식 찌꺼기와 쓰레기가

녀석의 몸과 털과 눈과 고양이 몸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을 채워갈것이다.

거리의 고양이의 삶이란 그런거니깐.

 

그리고 얼마전 밤에 쓰레기 버리고 오는 길에

검정망토 털무늬를 가진 다큰 고양이가 주차된 차 아래에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어두웠지만 다리의 흰 털때문에 고양이란 걸 알수 있었는데

이녀석... 보니깐 앞다리 한쪽이 휘어있었다.

아마도 다리가 부러지거나 한 걸 뼈를 고정 못시킨 채 그대로 접합이 돼서 그렇게 돼 버린거 같은데

혹시나 아직 다친지 얼마안돼서 교정의 여지가 있을까 싶어서 녀석근처에 조심해서 다가가보니

휘어진 한쪽 다리도 그럭저럭 잘 움직이면서 더 깊은 곳으로 피해버린다.

그냥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몇달전부터 봐왔던 그 말라깽이 노랑이 코숏이 냐~ 하고 나타나선 검정망토쪽으로 오는 것이다.

나를 보곤 멈칫하더니 결국 검정망토 쪽으로 다가갔고 결국 둘이 같이 저쪽으로 건너가버렸다.

 

뭐랄까... 둘이 같이 돕고 사나보다 싶었다.

그 꼬마고양이가 몇개월동안이나 동네에서 살아남은 것도 이 어른 고양이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둘이 만난건 어른 고양이가 다리를 다치기 전이였을까 후였을까.

사람들이 고양이한테 관심을 가지든 말든 동네고양이들끼리는 이렇게 교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그때 굳이 내가 그 아기고양이를 거둬주지 않아도

녀석은 말라깽이로나마 잘 자랐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인 내 입장에서는 그냥

고양이에 대한 괜한 혐오감과 증오심, 그리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만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

적은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면 되는거구나 싶었다.

 

근데 이 고양이들의 동네에 사람들의 공격(쥐덫,학대 등등)외에 다른 위험이 닥칠수가 있는데

그건 동네를 허물고 새로 짓게되는 경우다.

그때 고양이들은 자기들 영역과 터전을 완전히 잃고 다른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뭔가가 그자리에 오랫동안 꾸준히 있다는 건 굉장한 거다.

그자리에 있음으로써 생명을 키워낸다.

그곳을 지키는거다

 

지금까지 혼자 여러곳을 이사다니면서 동네 고양이들을 많이 만났다.

먹이를 주며 얼굴을 익힌 적도 있었고,

익명(이라기보다는 익面..)의 고양이에게 먹이만 공급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계속 있어줄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결국 고양이녀석들의 생활력만 떨어뜨려놓은채 그곳을 뜬 일이 많았다.

제멋대로 먹이를 주기 시작하다가 제멋대로 끊은 것이다.

지금처럼 어딘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상태로 일때문에 계속 이동해야한다면

그 와중에 만나게되는 고양이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 대해 난 항상 갈등할 것이다.

그자리에 그대로 계속 있는다는 건 그래서 정말 좋은 것이다.

 

중학교때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처음 읽었을때 ..이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무소유는 결국 쿨하게 사는 삶이라 요즘 사람들의 취향에는 참 맞는 삶의 자세다.

근데 그렇게 삶을 가볍게 하는 간소함도 필요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은 훨씬 다채로운 것이라

애착과 집착과 소유

보듬어주고 키워주고 그렇게 집착해주는 것 역시 소유하지 않는 쿨한 삶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쉽게 털어버리지 못하고 끈질기게,

트로이 땅 아래에 아홉층이나 되는 유적이 생멸한 것처럼 하나씩 쌓여가는 삶

 

 

평생 한도시에서만 살 것인지 평생 떠돌아다닐 것인지 이제는 이 질문에 정말 답을 못하겠다.

어느쪽이나 의미있고 필요한데

지금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절대적으로 전자가 마음에 든다.

지금 이삿짐싸는 게 너무 힘들어서ㅠ

물건을 솎아내고 버리는게 정말 힘듦 ㅠ

 

천연의 상태에서 아름다웠을 원소들이

인간들의 경제활동을 위한 재료로 이용되며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고

서로 섞이고 이젠 어찌 분리돼야 할지도 모를 애매한 형체가 돼 버린채

나한테 구매돼 왔다가

오늘 내 삶에서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버려지고 있다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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