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트 evil

2012. 10. 21. 23:17 from yS 2010▷2013

5주간의 과 실습이 끝날 무렵 학생들에게 설문지 작성 미션이 떨어졌다.

설문지... 어차피 누가 쓴건지 다 아는 설문지따위 귀찮으니 대충하자 싶었는데

아.. 교수님께는 완전 익명이 될 것이며

질문 내용도 'worst 레지던트'라든가 '개선에 필요한 점' 처럼

속에 쌓인 말을 다 털어놓을 데가 있어서 그래서 신이 나서 작성하려고 하는데

 

카톡방에 'worst 레지던트는 당연히 B선생님이죠' 라는 글이 불쑥 뜨는 거다.

B선생님...

B선생님은 이 과에서 완전 문제전공의인데

어떤 점에서 문제냐면...

완전 무능하다..

 

레지던트가 하는 일은 주로 병동관리업무다

입원환자를 평가하고 치료 계획 세우는데

이게 처음 입원할 때만 하는게 아니라 SOAP라고 해서

매일매일 환자 상태를 재평가하고 치료계획을 세워가는 거다.

물론 전공의는 아직 수련단계이므로 방향이 안 잡히는 환자에 대해서는 담당 교수님이 조언을 해주면서

그런 과정이 환자를 보는 training 과정인건데

따라서 SOAP는 매일 잘 써야 된다.

기록 작성 자체가 로딩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작성을 함으로써 환자상태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고

그걸로 자기 업무를 더 잘 정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의무기록이니까 꼭 작성해야 하는 거기도 하고.

 

첨에 B선생님에 대해 PK들이 수근대기 시작한 건 이 SOAP기록을 일주일씩 계속 안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PK가 환자 의무기록에 관심을 가지는 건 배정받은 환자에 대한 케이스를 작성하려는 건데

환자를 맡는 기간은 일주일이 채 안되고 환자 입원 기간은 그보다 길거나 짧거나 해서

결국 PK가 직접 환자 문진을 하고 피지컬과 같은 신체검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다.

따라서 담당 전공의 선생님들의 의무기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는데

이 중요한 의무기록을 안해주는 선생님이었던 거다 , B선생님이..

대학병원 의무기록은 열심히 근무하는 전공의들 덕분에 굉장히 잘 채워져있기 마련인데

완전 텅빈 의무기록지만 주루룩 나오는 전자차트라니 보고 황당했을 거다.

 

그래서 우리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B선생님..

SOAP를 안 쓰는 건 환자 관리이 너무 과중해서 도저히 SOAP작성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환자 관리 기록을 하는게 오히려 현재 상태를 더 명료하게 정리해줘서 일이 더 원활해질텐데

뭔가 상당히 일에 치이고 버거워하나보다 싶었다.

아직 수련중이니깐 버거울 수도 있고

정말 적성이 안 맞아서 고생하고 있는 걸수도 있을 일이었다.

 

또다른 소문으로는 쿨하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중환자실 담당 교수님이 B선생님에게

다음부터는 니가 중환자실 안 돌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는 거다.

환자 관리 정말 못한다며, 중환자실 맡으면 안되겠다고...

 

그래서 그냥 '아,,, 저선생님은 일을 좀 못하나 보다'라고만 생각했는데

근데 학생들도 이 일 못하는 선생님이야말로 당연히 worst 레지던트라고 대놓고 말하다니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이렇게 이 과의 교수님이나 높은 연차 선생님들에게 한심한 사람 취급당하는 사람을

학생들마저 worst레지던트랍시고 이름을 잔뜩 적어올리는 거 정말 싫었다.

설문지는 결국 '학생 입장에서'의 worst인데

이 선생님의 무능에 대해 왜 학생들마저 worst라고 지적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B선생님이 제대로 기록안한 환자 경과때문에 학생 누군가들이 피해라도 봤나

그래서 B선생님을 worst라고 찎었나

이런저런 생각들..

 

첨엔 이 매정한 세계, 정말 별로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진정하고 다시 생각하기론...

 

일단 '당연히 B선생님이 worst죠'라는 녀석의 말에 대해 큰 호응은 없었다는 거다.

그래서 학생들 각자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평가할 때, 어떤 사안을 볼 때 사람마다 참 다른 기준이 있는 거라는 걸...

이럴테면 '각자의 입장차'라는 말은 굉장히 쉬운데 그런 쉬운 말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아예 기본적 세계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이론들에 대한 증거같아서

그래서 좀 흥미로워졌다.

 

그러니깐 동의수세보원에 보면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은 각각  선악, 근타, 지우, 능부로 사람을 평가하는데

B선생님의 SOAP기록 미비에 대해서 worst라고 평가하는 학생은

뭐랄까... 근타 즉, 게으름이라든가 혹은 능부 즉, 무능하고 싹수가 없어보이는 그런점이야말로

몹쓸사람이 가지는 최악의 속성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있을 거다.

그에비해 내 입장에선 적어도

뭔가를 성실하고 열심히 해왔다고 해서 그걸로 다른 면을 용납할 수 있거나 그렇진 않은편이니

B선생을 worst로 뽑은 녀석과는 사람이나 세상을 보는 입장이  많이 다른 거지.

 

아무튼...

이worst 레지던트...

난 써낼 사람이 딱 정해져있어서 첨엔 신났지만

막상 B선생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 거론되자

더불어 학생들에게 확인 싸인점수를 100% 0점줘서 PK괴롭힌다고 소문난 K선생님

그 선생님이 혹시 또 누군가들의 worst명단에 오를까 걱정이 돼서

막.. K선생님이 과일도 주셨고 콜라도 주셨고 참 좋은 분인거 같다 와 같은 말을 카톡에 떠들어댔다.

어떤 학생들은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R샘 이름을 차마 적을 수 없으므로

자기한테 아무것도 안해준 R샘 이름을 쓴다고 했으니깐

0점 싸인으로 피해를 준 K선생님도 worst명단에 오를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게 되는 거다.

K 선생님은 좀 뭐랄까, 세상에 좀 치인 느낌이 있고

B선생님만큼 일 못해서 SOAP제대로 안쓰고, 약간 사차원으로 의국에서 따돌림을 받는 거 같아서

그냥 좀 안쓰러웠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0점주면서도 자조적으로 '나는 나쁜 레지던트'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worst라고 몰아대면 그 선생님의 내면은 점점 더 삭막해질 거 같아서 싫음.. 

 

그리고 내가 뽑은 worst..

흥...

나도 레지던트에게 확인 싸인을 받았다

다들 쉽게 쉽게 받는 만점싸인을 나는 그 R때문에 계속 반토막만 받고 있었는데

그래 사실 점수 받는 거야 결국 여러 상황이 맞물리는 복불복이니깐 별 불만은 없다.

케이스라든가 다른 평가에서 점수 팍팍 깎인것도 별로 신경쓰이지도 않고.

문제는 마지막 날 이 레지던트가 나에게

'내가 왠만하면 만점주는데 선생님은 도무지 안되겠네요'라고 환자 제대로 안본다며 빈정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쉽게 만점 받은 다른 친구들은 환자 아예 안보고 SOAP베껴 적어 냈지만

반토막 점수가 적힌 사인을 매일 매일 감사하게 받아온 나는 이 R때문에 환자를 매일 봤다는 거다.

점수 반토막은 상관없지만 도무지 안되고 어쩌고 비난은 정말 못 받아들이겠다

눈이 대체 어디 달려있길래 내가 '도무지 안될 사람'이 되는 거냐고.

이부분에서 기분이 팍 상했기 때문에 당연히 이 레지던트를 레지던트evil 넘버원으로 신나게 적어낸 거다.

익명 설문지 만세..

사실 마지막날 사인받으러 가기 훨씬 전에 교수님과 이 R과 학생들이 함께 하는 회진 일정이 있었는데

그날 교수님이 이 레지던트의 이번차 마지막 일정이라며 오붓하게 돌테니 학생들은 오지 마세요 라 했었다.

말이 좋아 오붓하게지... 학생들 있는데서 전공의들 야단치기 힘드니깐 오지말라고 하는 거지

내 예상으로 이 레지던트는 분명 회진 때 교수님한테 된통 까였고

그 스트레스를 나한테 푼거겠지. '도무지 안될 사람'이라며.

다들 그냥 SOAP베껴 싸인 받는거 자기도 PK해봤으면 뻔히 알것이며 자기도 분명 그렇게 했을 거면서

 '도무지 안될 사람'이라니

 

그래도 이 정도로 구는건 귀여운 거다.

worst에 이름한번 적어내고 퉁치면 될 사안이다 ㅋㅋ

 

 

전에 여자의사 펠로우와 짝짜꿍이 맞은 그 과의 의국장 여자레지던트는

인신공격 받고 나가는 내앞에다 '조에서 제일 미움 받는 사람이 발표하나봐요 낄낄'이랬고

다음날에 조 일정 보고 하러 갔을 때도 '사과하러 왔냐'며

지난밤 여자의사 펠로우와의 뒷담화 짝짜꿍을 과시하길래

밤새 쌓아놓은 분노를

'지적하신 부분이 정말로 죄송해서 말인데, 교수님에게 직접 사과하겠어요'라고 본뜻은 

'니네가 핑계대고 있는 바로 그 교수님한테 나 괴롭힌다고 일러바치겠다'의 뜻으로 해석되는 말로써

 집어던졌다.

그랬더니 교수님 화를 돋굴 것이라며 날 뜯어말렸고

자기 눈에 보이지 말라고 했으며, 결국 조장 갈아치우라는 말까지 했는데

이걸 또 학생들이랑 친분이 있는 1년차를 통해 다시 전달하면서

조장은 확실히 바꿔야 되고 불만 있으면 찾아오라고 그랬다네.

날 무슨 조원들 고생시키는 고문관 같은 존재로 만든 셈인데

끝까지 가볼까 하다가 걍 관뒀다.

애들이 워낙 바보같이 레지던트들을 두려워하길래,

내가 결국 걔들에게 피해를 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사펠로우-여자레지던트 의국장 콤비의 만행이야말로

설문지 피드백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는데

분명 그 콤비의 선수로 내 이야기를 주워들었을 그과의 다른 교수님이

구두로 과 실습 피드백 요청을 하셨다. 전혀 익명이 아닌상태로.

그때는 피드백이랍시고 좋게 좋게 돌려말하면서 속으론

'다음에 학기 말에 성적 나올 때 교수평가서에 악플을 달아야지' 라고 맘먹었는데

막상 학기말이 되면 귀찮기도 하고 까먹을 거 같다.

 

 

아..

그 여자의사펠로우가 교수님 복강경수술 어시스트 하는 걸 참관한 적이 있는데

복강경은 모니터가 시술자 시야쪽에 하나씩 있으므로 결국 한 필드당 최소 두개의 모니터가 있다.

교수님과 어시스트 펠로우가 각자 환자 반대편에 서서 수술이 진행됐고

난 교수님 쪽에 서 있었으므로 그 펠로우가 모니터를 보다보면 나와 시선이 마주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복강경수술이고 근무연수1년도 안돼서 그런지 펠로우가 굉장히 못하는 거였다. 

앞으로 가라고 하면뒤로 가고 그런식의 초보적인 서툰 모습인거지.

서툴면 서툰대로 하면 되는데 이 사람이 우습게도 자기 앞의 모니터를 안보고

자기 뒤쪽의 모니터, 즉 교수님이 보셔야할 쪽의 모니터로 등을 돌려 힘들게 보면서 서툰 수술 어시를 했다

그래서 나랑은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난 '그간의 모든걸 이해한다'는 느낌의 굉장히 따뜻한 시선으로 펠로우의 몸짓을 주시했는데

왜 그렇게 편한 모니터를 안보고 힘들게 허리를 돌려 뒤를 보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귀여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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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v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