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친구하나가
당시 학생들의 저조한 한자실력에 비해서 굉장히 한자를 많이 알았는데
할아버지 한테 배웠다며 한자 한자한자를 의미를 새겨가며 쓰는게 그렇게 재밌다던 그 친구...
목숨 수에 대해 숫자로 외워 쓸 수 있는 글자라며
士 一 工 一 口 寸7
이렇게 헤아리며 칠판에 쓰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목숨 수는 원래 대부분 저렇게 숫자로 헤아려가며 외우는 한자인가?
ㅎㅎ
몇주전 외부병원 참관을 나가 과장님 따라 병동회진을 돌던중,
보자마자 이 壽가 떠오른 환자분을 만났는데...
그러니깐 그 할아버지는 연세가 무려 95세셨다.
의무기록지 나이는 만으로 헤아리는 거니깐 민증상의 한국식 나이는 96,97세정도 되실거고
그나마도 옛날에는 늦게 출생신고를 많이 했을테니
이 할아버지가 실제 살아오신 햇수는 거의 100년에 육박하지 않을까..
그래서 옆에 보호자 여자분이
딸인지, 아니면 나이차가 서른살은 날법한 부인인건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튼 할아버지 모습을 본 순간 뭔가 굉장한 '감동'이었다.
길게 흘러내린 눈썹과 맑은 표정 곧게 세운 등..
이런 눈에띄는 세부적인 요소를 굳이 살피지 않더라도
마치 학처럼 고고해 보이셔서
물론 나는 학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감동은 할아버지의 고고한 외모에서만 비롯된건 아니다
할아버지의 연세를 확인한 순간 내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계산되던 나와의 나이차이.. 혹은 세대 차이
그러니깐 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무렵 이미 60대셨다는 말인데
20대 중반부터 그후로 꽤 오랜시간
사는건 그다지 재미가 없는 거구나 대체 어떻게 남은 생애를 채워야 하나 따위의 생각에 맨날 사로잡혀
어떤때는, 죽기전까지 40,50개의 여름만 더 지나면 된다고 굉장히 순식간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때는, 죽기전까지 견딜시간이 이만일 곱하기 이십사시간 50만 만큼 너무 멀어서 참을수 없기도 했던
내 입장에서
60이라는 나이는 이미,,,
하루가 백년인듯 백년이 하루인듯 더이상 별다른 변화도 없고,
심지어 모든 감각에 곰팡이가 피다못해 더 필 자리가 없어 아무 변동이 없을지경일 것이라
여겨지는 때도 분명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많이 다르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혼자 아둥바동 이놈의 세상 지겹다고..
그런 난리를 피우는 시간보다 훨씬 전에 이미 60대 이후로써의 삶을 충실히 살아오셨던것이다.
충실히...
충실하다고 하는 건
이 분의 표정이 맑고 눈빛이 또렷하시니깐..
살다보면 진정한 삶의 의미가 없는채로 그냥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될때가 있는데
그후 정말로 자기를 놓고 껍데기로써만 살면
그런 무너진 마음이 얼굴에 흔적처럼 다 그려진다.
얼굴을 보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가 보인다고.
그래, 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노인이셨고
그럼에도 내 전 생애보다 더 충실(대체 어떻게 충실하셨는진 모르겠지만)한 매일을 살아오고 계셨던 거다.
이런것도 어느 정도 집안내력,, 유전이겠지.
그래도 그렇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은은한 저력이 궁금하다.
대부분 다른 노인들, 혹은 자신을 버려놓고 와일드하게 삶을 던지고 사는 많은 젊은이들, 중년들..과는 다를
어떤 부분을 확인해 보고 싶다.
오래사신 분들은 정말 그 자체로 감동이다.
백살가까이 오래사신분들은 그냥 오래살았을 뿐이 아니라
마치 40년을 산 독수리가 자기 부리를 깨부수고 새로운 40년을 살듯이
나서자라 청년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생겼을 모습과는 전혀
다른 아우라가 외양의 한부분으로 자리잡는거 같다.
나는 과연 몇살까지 살 수 있을까.
내 또래가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아있을 때도 나는
다른 세대의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평정을 누리고 일상을 즐거워 할 수 있을까.
근데 할아버지...
호흡기 증상으로 입원하셨고
가슴 엑스선 정도에서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과장님께서는
'어쩌구 저쩌구 암의 가능성 어쩌구 저쩌구 더 자세한 검사'라는 얘기를 줄줄 하셨는데
할아버지가 그 설명을 듣고계신 걸 보니 이 상황이 뭔가 웃음이 나올거 같았다.
그러니깐
할아버지의 건강상의 문제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계시는 과장님은
나를 포함 대다수 사람들처럼 결코 이 할아버지만큼 오래살지 못할텐데도
이렇게 장수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건강에 대해 위협적인 말을 막 늘어놓고 있는 상황..
게다가 다른 모든 병실의 회진이 끝나고 다시 병동 복도를 따라 걸어내려가는데
이 할아버지가 기린처럼 훤훤한 모습으로 병동을 편하게 거닐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아무렇지 않은 편안한 모습이 과장님의 과한 질환 설명과 대조가 돼서
그래서 재밌었다.
부디 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