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조원

2013. 1. 29. 18:21 from yS 2010▷2013

강의실에서 공부할 때야 다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니깐 착한척 하지만

병원실습하다보면 결국 자기 힘든 상황에서 본모습, 바닥이 드러나게 된다고

이런얘기들은 이번주에 막 실습을 시작한 3학년들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해당 조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니미랑 내미랑 하다보니 서로 감정골이 생기고

결국 실습자체의 부담보다는 친구들.. 그러니깐 조원들간에 생기는 감정적 스트레스가

가장 큰 문제가 된다는 거.

 

학생일 때는 그나마 가장 최소한의 힘든일들이 닥치는 거지만

나중에 인턴 레지던트를 하게 되면 그 분담해야 하는 일이라는게 점점 커지고

서로 적정선에서 도움을 받고는 다시 안 도와주거나 하면 서로에게 나쁜놈이 돼버리니

 

전에 누군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련을 할 경우 안 좋은 점 중에 하나로 지적했던게

업무에 대한 책임 영역이 확실해서 누가 대신해준다든가 하는 그런

훈훈한 정은 절대 기대할수 없다는 점이랬는데

그게 사실은 더 합리적이라고도 생각했다. 단점이라기보다는...

 

아무튼 예전에 학부때는 실습조원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었는데

이번 3학년 한해 동안 필수실습과에 대해 실습을 돌면서 가장 힘들었던건

나역시 그 착한척의 가면이 벗겨진 우리 서로간에 대한 스트레스였다.

사실 별 기대를 안했다.

난 실습성적에 바득바득 기를 쓰지도 않았고

그냥 중간만 가자 주의였기 때문에,

내 성적을 위해 다른 조원들을 다그치며 몰아세울일도 없고

그냥.. '난 나한테 로딩이 느는건 괜찮은데, 제발 다른 조원들이 지각같은것만 안하면 좋겠다' 정도가

내 기대치라고 말하고 다닌거다.

 

근데 내 행동을 봐

 

 

외과실습조는 나랑 남자애 한명 이렇게 두명이었는데

이녀석이랑은 그닥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얘가 말하자면 외모가 그럭저럭 번듯한  '뭐, 나쁘지 않은걸~'이라는 호감상이라서

첨엔 인상만으로 괜찮은 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근데 이녀석 같이 실습을 돌아보니 굉장히 뺀질한 스타일.

어떻게든 요령을 부려서 해야 하는 일, 시간을 줄여내고야 마는데

자기혼자 요령잘부려서 실습 편하게 도는거야 나 알바 아니지만

이 외과실습이라는 파트가 결국 수술실 참관을 조원이 나누어 하는 거라

한명이 편하게 실습을 돌면 다른 한명은 죽어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녀석이 요령을 피우는 만큼 내가 수술실에서 추위에 더 떨어야되는 거지.

그와중에 스크럽(서는 것 따위 이제는 전혀 하고 싶지 않지만)을 설 기회가 생기거나 하면

그건 또 눈치좋게 미리 알아가지고선 그럭저럭 해볼만한 기회가 있는 수술은 자기가 들어가는 등.

한번은 논문두편 발표를 배정받았는데

발표순서상 먼저 발표하는 사람이 일반적이고 전반적인 내용을 발표하고

나중에 발표하는 사람이 세부적인 주제를 발표해야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한 발표순서였다.

근데도 발표순서가 앞쪽이었던 내가 세부적인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게 된 건

순전히 그 논문이 훨씬 길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전임의가 자기 메일로 보내준 논문을 자기 멋대로 그렇게 나눈거다.

아.. 정말로 얄미운 녀석이었다.

 

그래서 같이 실습을 도는 동안 이녀석이 얼마나 싫어졌냐면..

같은 조니깐 같은 수술을 들어가는 경우도 있는데 한번은 둘이같이 참관하는 걸 보던 수술실간호사가

(아마도 녀석의 언뜻 번듯한 호감외모때문에 괜히 더 관심을 가졌을 그 간호사가)

'둘이 사귀는 거 아니예요? 맞는거 같은데' 라고 농담같은 말을 던졌는데

그렇게 오해로라도 엮이는게 열받아서 수술실을 당장 박차고 나오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이 녀석이 얼마나 싫어졌냐면..

언뜻 번듯한 호감상으로 인해, 이녀석의 원래 실루엣은 어딘지 '서태웅 80%'정도였는데

같이 실습을 돈 이후로는

잔머리 굴리는 게 뻔히 보이는 눈만 보인달까.

중국고전만화에 나오는 눈 땡글땡글굴리는 동자 캐릭터의 그 영악한 눈빛

으아...

 

뭐 첨엔 좀 많이 깬다 싶었지만

그래도 나름 적응하다보니 나 스스로도 방어력(?)이 생기고 그럭저럭 공평하게 실습을 해나갔다

그러다가 외과 마지막날..

이녀석이 참관해야 할 수술이 하나 있는데

그걸 나한테 대신 해달라고

내 입장에선 '이 뭐 병'스런 어이없는 부탁이라

단칼에 거절을 했다.

그때 마침 옆에 다른 친구들이 있어서 내가 굉장히 옹졸한 사람이 돼 버렸지만

아무런 꾸밈음없이 곧바로 '노노 절대 노노'라는 대답을 화살같이 쏴버린 걸 보면

결국 얘가 그만큼 미웠던 거지.

자기시간 챙기는 것만 중요하고, 자기 몸 챙기는 것만 중요한 이기적인 자식...

 

 

근데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치를 떨고 있는 이 녀석의 이기적인 행동이라는게..

내가 맨 처음 실습을 돌 때 실습조원에 대한 내 기대치에는 또

전혀 떨어지지가 않는다.

사소한 지각같은거도 절대 한적 없고

오히려 지각이라면..

나야말로 외과실습 첫날 대박 지각을 해서 녀석을 곤란하게 했지만

근데도 또 신기한게 그런걸로 트집을 잡거나, 뒷담화를 하거나 하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는 거다.

 

그랬거나 말거나

이녀석때문에 내가 외과를 피곤하게 돌았다는 그런 피해의식에 찌들어있던 나는

2학기 남은 다른 과 실습을 도는 동안

이녀석이 다른 조에서 어떻게 미움을 받는지 은근히 주시하고 있었고

흠잡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니가 그럼 그렇지'라며 고소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기말 실기시험에서 이녀석 결국 유급을 당했다.

들어보니 실기시험도 요령껏 그동안 하던만큼만 하고 나온거 같은데

평가가 상대평가라서

'유급'의 공포에 긴장해서 평소보다 더 열심히 시험을 봤을

다른 '초식동물형'학우들에 밀려

이 요령좋은 녀석이 유급을 당한 거다.

 

실기시험에서만 낙제한거니깐 올해 실습을 다시도는 녀석을 병원에서 보거나 하는일은 없을거고

말하자면 앞으로 거의 볼일이 없을 건데

근데도 그냥 계속 이해가 안되는게

그렇게 아끼고 재어둔 시간과 체력으로 대체 뭐하려고

그리 요령을 피웠을까, 그리 대놓고 염치없이 굴었을까 하는거

딱히 성적에 집착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는데

 

 

암튼 같은 조원으로 겪은 후 미워했던거 사실이지만 유급같은거 당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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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v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