謎 惑

2013. 4. 15. 19:59 from yS 2010▷2013

 

 

실습을 하다보면 교수님들한테 이것저것 질문을 받게 되는데

보통은 실습과 관련된 질문으로, 예상질문지와 모범답안지도 전수돼 오고 있기 마련이다.

이런건,,, 미리 공부를 해둬야 하는 시험같은 거라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런 질문은 충분히 받을만하다고..

근데 가끔씩 좀 모호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라든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니? 라든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의사가 되는게 대체 뭐라고 생각하길래? 라든가....

질문을 하시는 거야 상관없는데, 저렇게 다종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사실은 당신께서 듣고싶은 답, 하고 싶은 말인 모범답안을 정해두고 계신다는 게 문제.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정말 피곤하다.

 

말하자면 생활인으로서의 교수님이 겪고 계신 중년의 사춘기를

학생들에게도 강요하게 되는 상황이랄까.

 

중년의 사춘기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아직 중년이 아닌 내 입장에서도 그런 종류의 질문을 하시는 교수님들이 어떤 심리인지

보인다.

다 아는 것처럼 건방떨지 말라고 해도 정말 다 보인다고.

눌어붙은 현재를 살아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시간이 오래되고

오래된 시간만큼 개인의 이상과 꿈(이 너무 오래되면 욕심이랑 분간이 안되기도 하겠지만)은 흐려지고

그런 흔들림이 낳은 사유의 결과물을 퍼뜨리고 계신 중이라는 걸 난 알 수 있다고.

 

물론 당신의 '말하고 싶은 욕망'을 위해 들어드릴수는 있는데,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와 다르게

그런 사유들이 더이상 내 마음에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키지를 않는다.

더이상 새롭지가 않아서다.

낙관을 위한 강박적인 낙관도 피곤하지만

내가 이미 아는 비관을 반복해서 듣는 건 더 피곤하다.

비관을 공감하며 함께 나누고 싶지가 않다.

그러느니 아수라같은 욕망속에 아득바득 열심히 사는 분들의 얘기를 듣는게 더 재밌다.

 

 

그러니깐 '내가 이미 아는' 비관이라는 게 결국 문제의 핵심인거다.

무수한 사람이 반복해서 경험해오고 있는 보편적인 비관.

구체적인 내용은 사실 별볼일 없는 것인지라, 좀더 원론적인 언어로만 추려져서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반복 전승되고 퍼지고 있는 이런 비관들은

내 삶을 흔들며 비집고 들어온 6,7년전과는 달리 

이제 내 마음에서 이미 식상해지고 흐릿해져 가고 있었는데

 

 

 

그런 그런 질풍노도 중년의 언어들 속에서

방사선과 C교수님의 한마디가 별처럼 빛난다.

 

C교수님은,, 굉장한 에너지를 쏟아내며 노는 분으로

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때 정말 열심히 마음껏 노는 분으로

수업시간에도 완전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며

학생들 또한 수업내용보다 그분에게 화끈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것을 더 신경써야 하는

그래서 원래는 좀 기껍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난 보수적인 학생이니깐.

그래도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야만 유머가 완성되는,

그런 폭력적인 개그코드가 결코 없어셔서

자기를 위해 남을 밟는 짓은 아마도 하지 않을 분이라는 면만 기껍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몇주전 C교수님 담당과를 실습하던 중.

여느때처럼 시시한 익살과 학생들의 리액션을 유도하며

수업내용보다 분위기를 추구하는 강의를 하시면서 문득

화면 속 방사선 사진에 대해

'아름답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다.

다른 최첨단의 영상이 아니라, 그냥 단순 엑스선 사진을 가리키며

그 흰색과 검은색에서 미학적인 어떤 면이 보이지 않냐고..

 

그래, 나도 물론 방사선 사진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조물이 뭔지 저 구조물이 뭔지 보고 외우는게 귀찮아 죽겠던 학생이 문득

흰것은 뼈고 검은 것은 공기라, 간결해서 아름답구나 라고 생각하며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공부를 작파한 학생의 미감과 

그 검은 것과 흰것들이 더 희고 더 검고 덜 희고 덜 검다며 각자 자기 소리를 내는 걸 다 알아채고 있지만

그럼에도 오직 검은 것과 흰것이 아름답구나 라고만 말씀 하시는 교수님의 미감을

감히 같은 거라고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걸 반복함으로써 추상적인 어떤 걸 문득 발견해내는 건

오직 시간을 충실히 견딤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40대는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데, 그 말대로 C교수님은..

중년의 사춘기를 전파시키려는 시시한 수수께끼를 던지며 학생들을 미혹하는 대신

세부적인 정보를 찾기위해 지난 20년간 매일매일 열심히 살펴보던 사진들 속에서 얻은 보편적인 영감을

시같은 한마디로 던져주신거다. 

 

C교수님은 중년의 사춘기를 그래도 그럭저럭 넘기고 계실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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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v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