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

2013. 1. 29. 20:17 from ETOCETORA

난 여자들이 아프다고 하는 거에 대해 좀 편견이 강한 편이다.

생리통, 편두통 그리고 입덧...

여자들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뭔가 2차이득을 원하거나 남에게 보이기 원하는 그런

히스테리성 성향, 신체화 성향이 드러난 것이 많다고

말많은 탈많은 생리휴가를 어떻게들 날로 먹고 있는지 많이 봐왔으니깐 그냥 그런 편견이 지속됐었다.

산부인과 돌때 입덧 때문에 입원한 환자들을 보면서도 임신 입덧 참 유별나게도 하네 라는게

솔직한 첫 인상이었다.

 

근데 이젠 알겠는데 입덧은 정말 무섭고 지긋지긋한 거다.

 

임신했다는게 딱히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티를 낼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 경우엔 입덧을 최대한 감추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꼭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집에서도 난 내가 입덧한다고 유세부리는 걸 받아줄 사람도 없었고

힘들다고 흐느적대며 누워있어봤자 밥 굶는 건 나 자신뿐인데 근데도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다.

입덧이란 건 실재하는 거라고.

그리고 입덧은 누가 열심히 써놓은 입덧에 대한 기록대로

그냥 귀엽게 우욱하며 배를 만지고 미소짓는 그런게 아니고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숙취상태에 빠져들고 처절하게 내장 속 끝까지 다 게워내고

그리고 엄청난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태다.

 

 

첫 2주는 참크래커와 토마토만 먹고 살았다.

입덧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읽어보니 이게 최선인거 같아 그렇게 먹고 살았는데

그덕인지 토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사실 메스꺼운 증상이 처음 생기고 이게 입덧이란 걸 알아차렸을 때 가장 무서웠던 게

구토를 반복하다가 전해질이상 상태로 집앞에 있는 우리학교 응급실에 실려가는게 아닌가 하는 거.

그래서 토하는게 무엇보다 두려웠고 안토하려고 이것저것 열심히 시키는대로 했는데

이 담백한 크래커를 아침에 먹고, 토마토를 한방울씩 주워먹으면 욕지기는 덜했다.

 

대신 2주동안 5Kg이 빠졌다.

 

그리고 굉장히 허기가 졌다.

내 몸은 완전 기아상태였고 머릿속에선 지방이 분해돼 케토산증이 돼 가는 몸 안의 상태가 그려졌다.

그무렵 우연히 집에 있는 기아에 관한 책을 흝었는데

아사라는게 고요한 죽음이 아니라

정말로 지리하게 지속되는 고통끝의 처절한 죽음이라는 말이 몸으로 이해가 됐다.

기아라는 건, 깡마른 아이의 큰 눈을 클로즈업해 찍어가서 전시돼가지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다.

최소 열흘은 직접 굶으면서 이해해야 하는 고통이지

 

그리고 거동이 불편해졌다.

 

만성질환 환자들의 상태를 평가하는 것 중에 일상생활을 얼마나 수행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지수가 있는데

질병과 관계도 없는 그런 수치들이 왜 의미있는지 이제는 알것 같다.

뭔가를 먹지 못하고 몸이 카켁식해지면 그냥, 움직일 수가 없다.

청소,, 못하고 목욕,, 못하고,, 세수같은것도 하기싫어진다 몸에 힘이 없어서 손이 안 들어진다.

기말고사 준비와 논문 등등 이어지는 '해야 할 일'들이 없었다면

아무런 원동력도 없는 나는 그냥 침대에서 굶어죽어도 이상할바 없을거 같았다.

 

그리고 이런 울렁증과 허기가 반복되는게 사람을 지치게 했다. 몸도 마음도 다.

 

항암 화학치료를 받으면서 식사를 잘 못하고 구역질이 나고 하는게

환자의 삶의 질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매일매일 생각했다.

환자들은 어쩌면 그저 메스꺼움때문에 삶에 대한 의지가 사그러들어갈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난 물론 가끔씩 뭔가 먹을수 있는 상태였으므로 내상태와 비교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이 고립돼 있을 어떤 고통스런 감각에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다.

 

 

소금기 있는 크래커를 입에 물어도 입에 단맛이 느껴질 정도로 크래커와 토마토에 물릴 무렵

우연히 냄새에 끌려 갈비탕을 먹었는데 그 무렵이 대략 입덧 3주차쯤이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단백질이 부족하다보면 흙이라도 주워먹는 이식증이 나타나는 것처럼

단백질 결핍상태에서 무작정 고기에 끌린거 같은데

그때는 오랜만에 느끼는 포만감이 정말로 행복해서 그래서 이제 입덧이 끝나는 건 줄 알았다.

난 원래 약간 웰빙을 추구하는 식단을 추구해와서

고기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하고 뭐 그런 종류 사람인데도

갈비탕을 시켜놓고 허겁지겁 고기를 뜯고

커피도 막 마시고(커피를 마시면 신기하게 일시적으로 울렁증이 가라앉았다)

한번은 갑자기 허기가 져서 밤중에 열심히 패스트푸드점에 뛰어가선 커다란 버거를 시키고

그자리에서 허겁지겁 먹는 듯하더니 결국 반도 못먹고 그대로 버리고 나오는...

신경성 식욕부진환자같은 행태를 보인적도 있다.

아무튼 덕분에 허기는 줄었지만 그만큼 먹은 것을 토해내는 일도 잦아졌다.

 

 

입덧이 대체 언제 끝날까..

12주라하기도 하고, 14주라 하기도 하고, 16주라 하기도 하는데

5주차에 입덧을 시작한 나에겐 정말 꿈처럼 먼 시간이라서

12월 한달은 대체 어떻게 하루가 가고 1주가 가고 한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힘들고 늦은 아침을 시작하면 하루종일 해야할 일에 대한 압박감과 메스꺼움과 허기에 시달리면서

먹을수 있는걸 찾아서 어떻게든 주워먹고 꾸역꾸역 몸을 움직이다가

할일을 남겨둔채 잠을 자도 스스로 용납될 만한 시간이 되면

역시나 차오르는 욕지기를 온몸에 감싸안은채 최소 한시간은 어지러움과 싸우다가 겨우 잠이 들수 있었다.

하지만 잠이 들면 뭐하나 다음날 아침이 또 굉장한 괴로움으로 시작될건데

이런 비관적인 생각

 

그러다가10주차에 들면서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적당한 음식을 적당한 양 먹으면 울렁거리지도 않고 토하지도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는 그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을 의식을 치루듯 음식을 먹었다.

일단 아침에 콘프레이크 종류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아침시간을 보낸뒤

10시쯤 편의점에 가서 참치마요네즈삼각김밥과 따뜻한 차를 사먹는다.

간단한 크래커 종류를 구비한 채 오전시간을 보낸 뒤

점심 때는 먹어도 될거 같은 음식을 열심히 생각해내서 그걸 찾아 먹는다.

저녁은 간단하게 빵 종류로 때운다.

이균형이 깨지면 그러니깐 좀 더 먹어서 포만감이 과하거나 좀 덜 먹어서 허기가 지거나

아니면 택도 없이 먹고 싶지 않은 걸 먹으면 곧바로 숙취상태로 접어들어거나 토하게 되니깐

먹는게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지고

또 항상'뭘 먹을까'를 생각하면서 뱃속에 걸신이 들어앉은 거 같은 상태로 지내는 것이다.

 

 

그래서 입덧이 언제 끝날까..

저런 조심스런 의식끝에 12주 쯤에는 입덧이 좀 가라앉나 싶어서 설렜는데

그 후 10흘 정도 또 굉장한 토악질에 시달렸다.

먹은게 늘어난 만큼 구토 횟수도 늘어났지만

그래도 초창기의 두려움만큼 구토라는 게 날 응급실로 이끌만큼 무서운건 아니었다.

그냥 좀 있다가 다시 먹을만한 음식을 챙겨 먹으면 되는 거다

 

이제 14주에 접어들었는데 지금도 가장 스트레스 받는게 '먹고 싶은 걸 생각해 내는 것'이다.

음식을 좀 먹을 수 있게 되면서는 음식에 대해 상상하는게 괴로웠다.

이 음식이 어떤 맛일까 상상하는 것조차도 때론 속이 울렁거리고

맛에 대한 상상이 잘 안돼서 상상하는 과정 자체가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또 가장 아쉬운건, 내가 선택한 음식이 거의 대부분 내 상상속의 맛이 아니라는 거다.

이게 정말 사람을 지치게 했다.

아무튼 14주차인 지금은 굉장히 살만하다.

난 밥도 먹을 수 있고, 카레나 커리도 먹을 수 있고, 멕시칸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중국요리 빼고는 거의 다 먹을 수 있다.

팥빙수라든가 맛있게 찬 음료들은 가끔 울렁거리는 순간에 정말 구세주다.

 

지금 생각으로는 아마 14,15주쯤이면 입덧이 끝나지 않을까 싶다.

입덧이 지나가고 나면 피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흡혈귀마냥

허기에 져서 식당가나 마트의 식품코너를 헤매던 나는 세상의 모든 음식을 폭풍 흡인해 줄거다.

그랬다간 임신중독증이 돼 버릴지도 모르겠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라 뭔가 보상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태교..

정작 입덧의 원인인 태아와의 교감은 정신적이라기보다는 생리적으로 한것같다.

심하게 울렁증이 올라올때, 그러니깐 토한직후에 토한 기운에 더 토할것같은 기분이 드는 그 상황에

나는 내 위장보다는 아랫배를 다독이며 '괜찮아, 진정해, 괜찮아 괜찮아'라고 열심히 말을 했다

 

입덧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근본이유는 임신이지만 그 과정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일단 태반이 생성될 무렵에 소멸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태반 생성전에 임부의 몸상태를 주로 유지시키는 hCG가 원인일것이다,,,

hCG가 구토중추를 자극해서 그럴 것이다.. 그게 대체적인 이론인데,

이제 슬슬 입덧이 진정돼 가는 걸 보니 태아와의 신체적 교감(태반)준비도 거의 다 끝난 거 같고

이젠 먹는 족족 이녀석한테 다 빼앗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어제 문득 들었다.

평소 먹는 만큼 조금씩 먹었더니 배가 너무 빨리 고파져서..

그래서 이녀석한테 지지 않으려면 열심히 더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더니

그간의 입덧이 무색하게 음식이 참 잘 들어가는 것 같다.

 

힘내야지

 

 

'ETOCETORA'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안의 싸이언  (0) 2013.06.04
GDM  (0) 2013.04.13
그래 나도 서울이 좋다구  (0) 2012.11.07
여름이야기  (0) 2012.09.02
요즘 응칠  (0) 2012.08.31
Posted by Nav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