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야기

2012. 9. 2. 22:13 from ETOCETORA

 

 

그러니까 때는 1996년 여름방학

하픈가 뭔가 하는 이상한 단체를 통해 지역학생들이 일본으로 캠프를 가는데 나도 거길 참가하게 됐다.

일정은 4박5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가서 큐슈지역을 놀러다니는ㅋㅋ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처음 외국이란데를 나가보는 것이었으므로 정말 설렜고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는데

 

그때 좋아하게 된 다른학교 남학생이 있었다.

집은 우리집 근처고 우리학교 근처인데 정작 학교가 굉장히 멀어서 버스로 한시간은 떨어진 곳..

캠프기간동안 '수줍은 마음에' 말한마디 제대로 못해봤던 게 굉장히 아쉬워서

그래서 때마침 여름보충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기회로 삼아

보충수업 끝나고 나오는 걸 혹시 볼까싶은 마음에

그 멀리 떨어진 남학교까지 맨날 찾아가선 정말 얼굴에 철판깔고 학교앞에서 기다리는 걸 일주일이나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학년은 이미 보충수업이 끝나서 그래서 학교에 등교를 아예 안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혼자 안달복달 하고 있던 걸 주위 친구들이 알게돼가지곤 남학생 이름을 알려줬더니

이름이 좀 특이해선지 친구 중 하나가 자기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바로 알아본 것이다.

지금 걔 우리학교 바로 밑에 있는 학원다닌다고 며칠전에도 거기서 봤다고 알려줘서

그래서 당장 학원에 주말반 하나 주중반 하나씩 수업을 신청을 하고 이제는 학원에서 얼쩡대다가

며칠 지난 후 겨우 학원복도에서 만나게 됐다.

우리학교 축제 언제냐고 나한테 쭈뼛 쭈뼛 물어본게 전부고 뭐 결국 아무 일도 안생기고 그렇게 지나갔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냥 뭔가 '성취감'같은 게 있어서 그걸로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어릴때의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건 이렇게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라서

따지고보면 좋아하는 감정에 빠진 자기 모습에 도취되는 게 전부인 것이다.

그러니깐 그 좋아하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될지 사람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할지 모르고

기껏 사냥후 느끼는 '성취감' 비슷한 걸로 끝나는게 전부인거지

열정만으로 진심인 척 하지만 지속력은 1초(이경우엔 대략 2,3주?)밖에 안되는 얄팍한 진심이랄까.

 

그래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때를 돌이켜보면 수줍음과 서투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절이다.

1996년의 내가 조금만 덜 자기위주였다면 어른스러웠다면 뭔가 다른 이야기가 생길수도 있었겠지.

 

 

여기까지는 내가 친구들한테 마치 '나의 성공담'이라도 되는양 많이 떠들어댄 이야기고

그후의 이야기가 또 있다.

 

 

대학졸업 후 사회생활이란 것에 내동댕이쳐지면서 시작된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지나간 시절의 사람들을 돌아봤던 시기가 잠시 있었는데

그때 이 흔하지 않은 이름의 남학생도 내가 흝어내리던 그때 그시절 사람들의 리스트에 올라있었고

쉽게 찾아낸 남학생의 싸이에 로그인 하지 않은 상태로 실명을 밝히고 방명록을 남겼다.

'지난 10년간을 돌아보려는 것 뿐이며 절대 스토킹은 아니니 불쾌하게 생각하진 않았으면'이라고 

아무 의도도 없고 그저 글자 그대로의 뜻으로만 글을 남긴 것일 뿐인데

며칠 뒤 피드백(이럴테면 답글)이 있나 싶어 다시 내가 남긴 글들을 흝어보다보니

이 남학생이 자기 싸이 배경음악을 그새 유리상자의 '사람찾기'로 바꿔놓은 거다.

나 자신이 그 남학생에게 있어 그시절의 누군가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로인해 지나간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전염돼서 생긴 복합적인 향수로 그런걸수도 있고

아니면 그무렵 그 남학생이 어장관리하는 누군가들에게 그리움 컨셉처럼 보여주려고 한짓일수도 있지만

혹시나 내글때문에 그런 티나는 청승오글 선곡을 했다 하더라도

그래..

난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희화화하거나 조롱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없다

나도 그런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고

또 그런 감정을 꾸미고 감추는 것보다 그냥 터는게

촌스럽지만 순수한 거니까.

난 그냥..

방명록을 남길 당시의 나나, 지금 이런 글을 쓰는 나나

전혀 심각하지도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은채 그 시절의 이야기를 쉽게 떠들고 있는데

그게 또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아름답게 채색돼서 기억되거나 혹은

자기기준으로 아름답게 포장된 기억을 누군가에게 얘기해서 이용하거나

이런거...

이런거 살면서 너무 듣고 봐서 조금은 시시했다.

자기위주의 추억으로 아련돋는 것도 참 시시하고...

아니..

그래도 어디까지나 사는 건 자기 위주니깐 아무리 시시해뵈도 본인의 기분은 소중한 거다.

게다가 내가 혹시나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면 그자체로 감사하다고도 생각한다.

대체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는지도 궁금하고 기억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시시하다는 말은 아무래도 취소.

 

그 이후로도 호기심에 가끔 찾아들어가 봤지만

그 이후로 전혀 업데이트도 없고 노래는 그이후 계속 '사람찾기'로 돼 있는

그 남학생의 싸이.

부산에서 의대를 졸업한 후 이제 신경과 레지던트를 끝냈을 테고 

지금쯤은 어디선가 공보의를 하고 있을텐데

분명 좋은 사람이고 좋은 의사일듯 함.

 

 

 

 

 

지금 이 얘기를 떠올린 이유는 DJ DOC의 여름이야기 앨범때문이다.

1996년 우리팀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버스를 타고 단체로 이동했는데

그때 한창 유행하던 DJ DOC의 여름 앨범이 계속 흘러나왔고

당시의 내 기분때문에선지 노래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고 호감도가 상승해서

그래서 캠프 끝나고 돌아오자마자 당연히 그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들었다.

산걸 버리지도 않고 모아두는 내 습성상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름이야기 테이프는 남아있고

요전에 라디오에서 DJ DOC노래 얘기가 나와서야 다시 꺼내 들어봤는데

최소 10년은 안 들은 거 같은데 지금도 테이프 늘어지지도 않고 잘 나온다.

 

정리정돈의 습관이라는 책에는

사람들이 과거의 낡은 물건을 쌓아두는것에 대해 악순환을 부르는 집착이라고 하며

물건에 유효기간을 두고 버리는 것을 추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거 나한테는 별 의미도 없는데 그만 정리하고 버려야겠지.

하지만 부산에서 카멜리아호를 밤새 타고 후쿠오카 가보는 건 

부산 사는 동안은 한번쯤 다시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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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avi. :